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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 항쟁의 예언자, 김의기 열사 30주기 기념 추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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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21-10-06 15:54 조회1,6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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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열사(1959.4.20-1980.5.30)는 1959년 4월 20일 영주 부석에서 아버지 김억, 어머니 권채봉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70년대 초 가족과 함께 상경한 열사는 농사를 짓는 큰형,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하시는 누나와 작은형을 보면서 사셨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사는 늘 밝고 활달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러다 유신 반대 시위가 격렬해지고 새로운 투쟁을 모색하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던 때에, 열사는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76학번 새내기가 되었습니다.



뒤로멈춤앞으로
집안의 막내이자 유일한 대학생이 된 열사는 가족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 상승만으로 가족의 힘든 생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그의 사회 인식은 깊어졌고, 그는 어머니에게 졸업 후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권리를 찾겠다는 꿈을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KUSA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농촌 연구에 열심이었습니다. 특히 유신 독재 체제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던 농민들을 돕고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었던 농촌 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습니다.

자신의 장래 전망은 농민 운동이었지만 열사는 유신 정권의 붕괴를 보며 졸업을 늦추기로 결심하였습니다. 80년 새 학기와 함께 학생회 등 자율적인 학내 기구들과 그 활동을 부활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80년 5월 광주에서 마침내 신군부 세력은 그들만의 집권 시나리오를 집행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저항은 성스러운 시민 항쟁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운동 세력들이 신군부 세력의 무자비한 검거 열풍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때, 열사는 광주로 달려갔습니다. 광주에 가게 된 이유나 과정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김의기 열사는 삼엄한 계엄령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대중에게 광주의 투쟁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걱정하는 가족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30일 낮, 기독교회관 6층 사무실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에게 글의 원본을 건네주었습니다. 열사가 오후 5시경 기독교회관 앞에 포진한 중무장 장갑차 사이에 떨어져 즉사하기까지의 과정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열사가 뿌린 유인물을 100% 현장에서 수거했고, 열사의 어머님에게 순국한 아들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았습니다. 열사는 당시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 신군부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의 불꽃을 지피는 데에 자신의 온몸을 던지며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스물 둘, 시리도록 푸른 청춘이었습니다.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활활 타오르던 김의기 열사의 투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열사'라는 단어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일 것입니다. 그것도 진행형 동사.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김의기 열사를 추모합니다. '김의기 열사'라는 진행형 동사를 가슴에 새깁니다.

다음은 광주 민중 항쟁의 예언자, 김의기 열사 30주기를 맞는 추모시입니다. 

                                                      
김의기 열사여

집안의 6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 문에 들어선 그대는
대학 2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소위 '문제 학생'이 되었다.  

"형님들이 기름옷을 입고 일하는데
내가 어떻게 좋은 옷을 입겠는가?"라며
늘 흰 고무신에 물들인 군복 바지를 입고 다녔던 그대.

빛고을 광주에서의 그 처참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아직도 온 땅에 진동하던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한 그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곤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입이 있어도 감히 누구도 입도 뻥끗하지 않았던
광주의 참상을 온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그대, 시대의 예언자여,
광야에서 고독하게 진실을 외친
21살 꽃다운 나이의 청년 예수여.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김의기 열사의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 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 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 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 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 숫자와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 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 가진 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라! 우리의 힘을 모아 싸워 역사를 정방향에 서게 하자.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 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라, 일어나라! 동포여!

매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라!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출처: 뉴스앤조이] 광주 민중 항쟁의 예언자, 김의기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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