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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여,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5·18 알리고 투신한 김의기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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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21-10-06 16:14 조회2,82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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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김의기(사진·1959~1980) 형제를 ‘5·18광주민주화운동’ 열사로 기억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그를 호명하지 않았지만, 김 형제는 1980년 5월 광주 현장을 목격한 뒤 서울로 상경해 시민들에게 계엄군의 유혈진압 실태를 알린 최초의 인물이다.


서강대 무역학과 재학 중이던 그는 농촌문제에 관심 갖고 활동하던 청년이었다. 고(故) 김동완 목사가 담임하던 형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크리스천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하던 당시 그는 농민문제 관련 회의 참석차 광주에 내려왔다가 현장을 봤고, 그 참상을 외부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80년 5월 30일 오후 5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고 투신했다.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공포에 떨며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시민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 글의 일부다. 

김 형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대한민국 민주화에 한 알의 ‘밀알’이 됐다. 이후 어머니 권채봉 여사(작고)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에서 활동했다. 누나 김주숙(62) 씨는 동생이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며 신학을 공부했으며 이때 만난 박철 (부산 좁은길교회) 목사와 결혼해 사역해왔다.

주숙씨는 매일 검정 고무신에 낡은 점퍼 차림이던 동생이 안쓰러워 양복과 구두를 선물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김 형제는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서 생전에 한 번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옷과 신은 시신이 된 주인과 함께 땅에 고이 묻혔다.


주숙씨는 21일 광주 ‘시민의 날’ 기념행사에서 유가족으로서 광주시의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동생을 기억해준 광주시민들에게 감사하고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이걸 보셨더라면 정말 기뻐하셨을 것 같다”고 했다. 매년 김 형제를 추모해온 감리교 청년회 전국연합회는 27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서강대 교정에서 올해도 ‘김의기 형제 추모제’(포스터)를 연다.

강주화 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483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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