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_제2회의기문화상(장려상)_수필_김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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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9-05-15 13:37 조회1,4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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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은
만난 적 없는 이의 발자취를 좇아
‘은아, 너는 지금 묘지로 가고 있는 거야.’
아버지가 보낸 카톡이었다. 가슴이 섬찟해졌다. 광주행 KTX 열차에 몸을 실었지만, 내가 마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소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스쳤다. 하지만 왠지 지금 그곳을 보고 와야 할 것만 같았다. 광주와의 인연도, 김의기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몰랐으면서 왠지 그해의 6월에 광주에 가야만 할 것 같았던 그때의 결심이 지금 와서 돌이켜 봤을 때도 신기할 따름이다.
김의기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의기제에 대해서는 광주 민주 항쟁을 알리다가 돌아가신 선배를 기리는 행사라고 전해 들었다. 자랑스러운 선배이기는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그런 인물, 김의기 선배는 내게 그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2018년 의기제가 김의기라는 인물을 다시금 기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죽어서 살지 아니하기, 사람으로 살기’라는 의기제의 주제 문구는 당시 학생회 활동으로 인해 힘들었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처음 학생회 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2016년의 이사회 사태, 그리고 파행으로 진행된 총장선출 절차 때문이었다. 학교에 재정적인 기여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재단 이사회, 그리고 자격 미달의 후보를 그대로 두고 사실상 예수회에서 내정한 후보가 총장이 되는 현실에 분노했다. 교내에서 시위도 벌이고 여러 대자보와 현수막도 게시했지만, 총장선출에서 투표권조차 행사할 수 없는 학생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이후 3학년이라는 늦은 시기에 학생회에 들어가 학교의 만성적인 문제점들을 바꿔보려 하였지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매년 해왔기 때문에 올해에도 진행하는 고정 사업들, 그리고 여러 행정적인 업무에 치이다 보니 처음의 목표와 다짐은 희미해져만 갔다. 죽어서 사는 것만 같았기에 그 문구가 더 멋있었나 보다.
특히 2018년은 총학생회가 은하선 강연 초청으로 인해 크게 휘청이던 시기였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지목된 은하선이 강연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 그 발단이었다. 학내에서는 강연자의 자질에 대한 건전한 논의가 진행되는 대신 페미니즘에 대한 온갖 백래쉬로 들끓어올랐다. 불똥은 의기제로까지 번졌다. ‘지금 이 시대의 저항’에 초점을 맞춰 페미니즘 강연을 진행하던 의기제 기획단에 대해서도 과연 페미니즘이 의기제 주제로 적합하느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학내에서 여러 성폭력 사건을 마주했고, 또 학생회로서 성폭력 사건의 후속 대처를 담당했던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평소 의기제에 대해 관심이 있기는 했는지, 단지 건수를 잡았기에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닌지, 페미니즘만큼 이 시대의 저항에 어울리는 주제가 얼마나 더 있길래 다들 그러는 건지 따지고 싶었다. 특히나 그 싸움의 최전선에 있었고, 익명의 학우들로부터 조롱을 당하면서 고통받던 이들이 나의 주변인이었기에 나 또한 너무나 괴로웠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같은 학생회 안에서도 의견이 다른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을 설득하다가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 외로워지곤 했다.
마침 그 해의 의기제 기획단에는 가까운 이들이 몇 속해 있었다. 함께 광주기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일정상 함께하지 못했던 게 마음의 짐처럼 남아 있었다. 6월이 되고, 다들 기말고사 준비로 바빠지자 휴학생이었던 내게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생각이 많은 날에 찾아온 여유는 독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방향을 찾고 싶던 때에 문득 광주에 다녀오고 싶어졌다. 제일 강렬한 의지를 가졌던 그들을 마주하고 나면 나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충동적으로 광주행 KTX 왕복 표를 끊고, 전날 밤에 부모님께 광주기행을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광주송정역에 내려 점심을 먹고 바로 5.18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6월의 햇빛은 따가웠다. 입구는 여느 공원과 다름없었지만, 멀리서부터 사진으로만 봤던 조형물이 보였다. 너는 지금 묘지에 가고 있는 거야, 아버지의 메시지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르막길의 끝에서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묘비에는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사망 당시 나이, 사망 날짜, 사망 당시의 상황이 쓰여 있었다. 그 중에는 10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사망 원인은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전경의 비위를 거스른 이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갔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어간 이들은 곁에 나란히 묻혔다. 전남도청을 지키다 죽어간 이들의 이름도 있었다. 몇 십 년 전에 스러져간 이들 사이에서, 왜 나오는지도 모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일빌딩을 보았다. 선명히 남아있는 총상, 그 아래에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김의기가 보았을 장면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묻힌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그들이 선홍빛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현장이었을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주저앉았을 법한 시대 앞에서, 그는 자기의 한 몸을 바쳐 광주의 진실을 알리면서 산화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그는 그가 남긴 말대로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되었다. 나를 바라보았다. 이 시대의 김의기를 자처하기에 너무나 초라한 존재였다.
당연하게도,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하고 김의기 열사를 추모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내가 찾던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당시와 지금의 상황 또한 너무나 다르다. 5월 18일의 광주를 마주했던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저항했다. 지금의 대학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라는 한 공간 안에 있어도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간다. 각자의 장래는 매일의 이야깃거리가 되어도 학교의 문제나 사회 정의 따위는 친구들과 쉽사리 이야기할 주제조차 되지 못한다. 같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부 통폐합조차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가 되기보다는 ‘우리 학부의 일이 아니면 상관없는 일’로 치부되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안위보다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학교 재단 이사회의 구조적인 폐쇄성을 비판하고, 누군가는 성추행 교수가 교단에 서는 것에 저항하며, 누군가는 좀 더 평등한 세상을 위해 기본소득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혼자라면 진작에 무너졌겠지만 얼마 남지 않은 그들과 함께하며 버틸 수 있었다. 이 학교 안에서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나와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을 새롭게 만나면서 한동안 젖어 있던 우울감을 어느 정도 떨쳐 낼 수 있었다.
같이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는 자기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이들을 두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들을 이 시대의 김의기라고 부르고 싶다. 비록 목숨을 내어놓는 정도의 저항은 아닐지라도, 척박한 땅에서도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바로잡을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뒤쳐지는 길을 선택한 이들. 그들이 있기에, 2019년의 5월은 여전히 푸르다.
김시은(2015,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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