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제1회의기문화제(대상)_수필_정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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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8-05-15 13:16 조회1,23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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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1.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애써 표현을 하려 해도, 모든 단어들이 세계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리는 날이 있다. 아침 수업이 유독 힘든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날이다. 회색의 하늘은 좋은 원고지가 된다.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빗물에 스민다. 버스는 속절없이 학교로 향한다. 김으로 흐려진 창문에 머리를 기댄다. ‘그날’을 위한 말들을 찾아야 하겠다는 의무감이 들지만, 비 오는 하늘을 쩌렁하게 울리는 고요함이 한때 부드러웠던 세치 혀를 굳힌다. 그저 회상하는 일만이 남는 날이 있다.
이제 와 고백한다. 그날 나는 무서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그곳에서 떠나고 싶었다. 넓은 대로가 경찰 벽으로 막혔다.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발 아래로 흰 최루액 거품이 흘러갔다. 마스크를 써도 알싸한 냄새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따가운 눈에 물을 부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느껴졌다. 아팠다. 온몸이 따가웠다.
“여기 사람이 죽었어!” 일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는 건 나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이명이 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싶었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 죽었다.
사람, 죽음.
모든 운문이 산문으로 풀어헤쳐졌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비유도 불가능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시인이 온다 한들, 사람이 죽었다는 그 흔한 사실보다 슬픈 문장은 없을 것이다. 어떤 슬픈 말도 최루액에 젖어 비뚜름히 뉘인 그의 몸 앞에서는 모욕밖에 되지 않는 날이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2015년 11월 14일의 일이었다. 백남기 농민은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부춘마을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박정희 시기에 2회 제적을 당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복학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1980년 5월 초까지 민주화운동을 벌였지만 5·17 쿠데타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체포되었다. 중앙대학교에서 퇴학당했고,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018년 4월, 백남기의 사망 사건 당시 지휘‧감독을 소홀히 한 혐의로 기소된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검찰이 금고 3년을 구형했다.
그날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참 느렸다. 분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연옥처럼,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그땐 우리 모두 그랬다. 웅장한 벽 앞에서 뒷걸음질치며 샛길을 찾아보려 했던 날들이었다. 어찌되었든 시간은 흘러갔고 버스는 학교 후문에 도착한다. 말을 찾아야 한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라도 좋을 것이다.
2.
오늘 수업에서는 이런 것을 배웠다. “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 이외의 것들은 의심할 수 있어도, 의심하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말이었다.
생각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약속받을 수 있다면 “사람이 죽었다”는 문장도 없었을 것이다. 백남기는 그가 했던 생각 때문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으며, 그에 따라 행동했고, 고로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종이 울린다. 종이 그친다. 학생들은 줄지어 다음 수업으로 향한다.
또 이런 것을 배웠다. “경찰과 정부가 행하는 폭력은 법을 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적 폭력이고, 그에 반해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혁명은 수단 그 자체가 목적인 순수폭력이다.” 훌륭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이었다.
백남기가 쓰러진 이후 사람들은 용케도 그가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을 찾아내었다. 전문 데모꾼의 죽음은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의미의 집회라면 폭력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폭력을 행했으니, 그는 죽어도 마땅하다고 했다. 종이 울린다. 종이 그친다. 학생들은 집으로 간다. 나도 또다시 버스에 몸을 싣는다.
혁명은 너무 무겁고, 철학은 너무 가볍다. 제아무리 현명한 자의 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에는 가 닿지 못했다. 말은 실제로 일어나는 죽음들을 바꾸지 못한다. 애초에 ‘말’속에 답은 없음이 선명해진다. 문득 말할 수 없는 그날의 촉감들이 그리워진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떨리는 목소리,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몸부림, 따가운 눈 위로 흐르던 물 같은 것들 말이다. 말이 멈춘 자리에, 삶이 흉터로 남아 있다. 버스는 집에 도착한다.
3.
나의 작은 방은 아침에 두고 간 모습과 똑같다. 다만 어둠으로 가득 찼을 뿐이다. 밤이 되면 죽는 것이 무섭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잠에 들 무렵, 갑자기 내가 죽은 뒤에 올 억겁의 세월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숨이 탁 막히면서 불을 켜고, 아직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려고 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은 축복이고, 그렇기에 식은땀에 젖은 손으로 자꾸만 그것을 붙잡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어찌어찌 죽음 이후를 살아간다. 그 어떤 시간도 누군가의 죽음에 앞설 수는 없다. 백남기는 광주 열사들의 죽음 이후를 살아갔고, 우리는 백남기의 죽음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이름 없는 죽음들까지 생각하면, 매일은 누군가의 기일이다. 그의 죽음 이후 3년이 흘렀다. 세계가 바뀌었다고들 한다. 사실이다. 비록 작지만, 누군가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를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죽어간다. 조명도, 무대도 없는 죽음들이다. 일자리를 뺏긴 노동자들, 성폭력을 당하는 여성들, 거리로 몰려나는 장애인들, 꼽자면 끝이 없다.
죽음 앞에 삶이 있듯이, 죽음 뒤에도 삶이 이어진다. 밤이 되었다. 죽음을 둘러쌌던 삶을 기억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어둠 앞에서, 다시 삶을 사랑해야만 하겠다는 욕망이 움트는 시간이다.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찬란한 시간들은 있었다. 한 사람이 쓰러졌던 날, 나는 그 날의 오후를 기억한다. 제각기 솟은 깃발들이 우렁찼다. 민주노총, 전교조, 각종 시민단체. 깃발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펄럭였다. 차들은 에둘러 갔고 사람들이 대로를 점령했다. 하루의 끝은 누군가의 죽음이었지만, 우리는 그 끝으로 향하기까지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 시간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80년 광주, 전남도청에서의 마지막 날을 비통함으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 앞에는 삶이 있었고, 그 뒤에도 삶이 있다. 수많은 죽음을 기억하며,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의 죽음과 나의 삶을 연결하며, 그의 밤에 나의 아침을 조금씩 나누어 주면서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죽음에 맞서는 방법이다. 그것이 우리가 긴 밤을 지새우는 방법이다.
말보다는 무겁고 혁명보다는 조금 가볍게, 죽음을 삶으로 에워싸고 싶다. 혼자 말없이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다. 그 가운데서 나의 밤도 아침으로 뒤덮일 것임을 믿는다. 약속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때 잘 지켜진다고 했다. 이것은 나의 고백이다. 그리고 나의 약속이다.
정희수 (2014.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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