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_제1회의기문화제(장려상)_시_김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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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8-05-15 13:20 조회1,1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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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5월은 무엇입니까?
청년은 불과 몇 년 전 중고등학교 학생일 때 자연스럽게 대통령을 풍자했던 말들을 친구들과 장난으로 주고받곤 했었다. 1997년 5월 막바지에 태어난 소년에게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끔 뉴스를 보다보면 화가 치밀 때가 있다. 이럴 땐 페이스북을 키고 몇 마디 때려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기에.
작년 10월쯤 전두환의 회고록에 대한 뉴스도 처음 보자마자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옆에는 아버지께서 티비를 보시다가 놀란 눈을 하고 계셨다. 고등학교 때까지 광주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듣는 것은 친구들의 농담이었다. 일베라고 부르는 커뮤니티에서 광주는 폭동이라는 말을 보고 장난으로 옮기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소시민으로 살던 청년으로서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막연하게 불쾌할 뿐, 분노라거나 한탄하는 감정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다만 소심하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어투를 하거나 반응하지 않을 뿐이었다.
장애인 동생을 둔 소년은 주변의 소위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언행을 극도로 혐오했다. 중학교에서 일진 무리들이 한 지체장애인 친구를 장난이랍시고 때리고 있을 때 소년은 다행히도 마찰 없이 그 친구를 빼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노동조합이라는 말만 꺼내도 그거 빨갱이 아니냐고 묻던 친구에게, 소년은 최규석 작가의 ‘송곳’이라는 웹툰을 알려주었고 2년이 지난 뒤 그 친구는 자신이 예전에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런 소년도 입시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바득바득 서울대에 들어간다고 재수를 하더니 서강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학기 초반에는 반수해서 서울대를 간다고 말하고 다니던 청년은 우연히 학내 청소노동자 연대기구인 맑음에 들어가게 되었다. 노동자 연대라는 곳의 모임도 몇 번 나가보게 되었다.
평소처럼 페이스북을 뒤지다가 의기제를 처음 알게 되었다. 정치나 철학,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은 그렇게 의기제 광주기행을 가게 되었다. 처음엔 의기제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광주 민주 항쟁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의기는 義氣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참가했던 광주기행은 입학 후 청년에게 가장 큰 전환점일 것이다.
의기제 이전의 청년은 518이 정말 민주 항쟁인지, 아니면 소위 북한 간첩으로 인한 폭동인지 모르겠다고 소심하게 말했었다. 그 청년은 광주에서 당시의 생존자들을 만나고, 5.18민주묘지를 돌아다녔다. 광주 항쟁의 주체들은 특별한 이들이 아니었다. 모두 나와 같은 한 사람이고 가족이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건물에 붙어있던 현수막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청년은 대개 ‘임차인도 사람이다!’라는 구호가 적인 현수막을 자주 봤었다. 그런데 광주에서의 현수막은 ‘임차인도 시민이다!’였다. 충격이었다. 짧은 순간 동안 그 짧은 문장이 여러 문장이 되어 가슴 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 모두는 시민이다. 우리는 존중 받아 마땅한 인간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광주는 내게 그런 인상으로 말을 걸어왔다.
광주청년은 청년이 이때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을 통째로 뒤엎게 된다. 광주는 민주항쟁의 역사다. 독재의 거센 폭풍을 그들은 온 몸으로 맞았고, 막았다. 그리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불과 20년 뒤에 태어난 소년이 학교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정권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들의 피가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웠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한다. 또 그 경험은 세월호에 대해서도 갈피를 못 잡던, 국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청년에게 한 가지 확실한 답을 강렬한 인상으로 남겨놓았다.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 이후 청년은 광주 민주 항쟁 당시의 기록물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한다. 남을 위해서 울어본 적이 몇 번 없던 청년은 이제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친다. 국가가 국민을 죽였다. 나라가 인민을 죽였다.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국민에게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저질렀던 학살을 마주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청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느낀다.
청년은 가끔 조용히 반문한다. 네가 그 곳에 있었다면 그들처럼, 김의기 선배처럼 행동할 수 있겠냐고. 인간관계에서 두려움이 많았던 청년은, 자신의 신념 앞에선 두려움 없이 행동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청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대답할 수 있다.
그 장면에서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연대가 아닐까. 이전까지 청년은 연대의 의미를 몰랐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가슴으로 내려온 적은 없었다. 5월 광주의 경험은 청년에게 연대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총, 칼 그리고 곤봉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자신과 가족들, 내 이웃을 스스로 지키자는 뜻으로 무장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지켜냈고, 상처를 품고 이겨냈다.
매년 5월 축제에선 맑음 분회원님들이 엄마손장터를 여신다. 맑음 회원인 청년은 당연히 참여하게 되었고, 장터를 마치고 남은 전과 막걸리로 함께 기분을 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 학번 위의 선배를 한 명 만나게 되었고, 총학생회 연대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총학생회 활동을 시작한 청년의 가장 큰 변화는 주변 사람들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소위 운동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운동권은 아니지만 서강대 흐름에 따라 다양한 의제들에 힘을 쏟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은 그곳에서 연대가 무엇인지 여러 번 더 체험한다.
채성준(2017. 경영)
작년 이맘때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기억난다. 5월 광주가 나를 키웠다. 1980년에서 17년이나 지나 태어난 청년은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다만 청년은 이렇게 말한다.
“5월 광주가 나를 바꿨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 뜻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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